[한국] 장보고 유적/유물-장좌리 법화사지
완도 장좌리에서 상왕봉(象王峰)으로 오르는 큰 골 오른쪽에 고려 때에 창건되었다는 법화사터가 있다. 법화사에 관한 두 문헌 자료에는 각각 창건연대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7 강진현 고적 법화암)에는 법화암이란 암자가 상왕봉 아래 전석계(全石溪)와 천연대(天然臺) 근처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자료의 하나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전라도 권5상 강진현 고적)에는 고려시대 정언 벼슬을 하던 이영(李穎)이 완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숙부였던 스님 혜일(慧日)이 따라 왔다.
그 뒤로는 자주 방문하게 되자 절을 세워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절이 앞에서 말한 고려 때에 창건되었고 지금은 장좌리 961번지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법화사를 말한다. 『동국여지지』의 찬자가 어떤 기록에 의거하였는지는 모르나 법화암의 창건연대와 창건자를 밝혀준 셈이다. 이들 기록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서 최소한 16-17세기까지 법화암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터는 1990년도 문화재연구소팀이 발굴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절터로 확인되었다. 그것은 법화사지로 전하는 경내에서 모두 7개소 이상의 시대가 중첩되는 건물지를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토 유물 중 명문이 있는 기와 조각도 찾아내어 그 연대를 1130년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휘종 때(1102-1106)의 청동주화 1점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완도 법화사 터에서 나온 유물로는 이 절은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문헌사료와 발굴결과가 일치된 셈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전석계(全石溪)와 천연대(天然台) 인근에 있었다고 하는 법화암은 유적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고려 때 혜일 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법화사가 곧 『여지승람』의 법화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법화사와 법화암은 별개의 사찰이며 두 절의 창건도 시대를 달리한다.
장좌리 961번지의 법화사는 청해진이 소멸된 뒤에 장보고가 세웠던 법화사의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보고가 모살된 뒤에 이곳 주민들까지도 이주시킬 정도로 청해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나 그 당시의 사찰 흔적이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여러 상황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완도 장좌리의 어디인가에는 청해진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 완도의 고로 은송(박영희) 스님의 글 가운데 법화사지를 상왕봉 하의 불지등(佛持墱) 산록에 비정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형 불상(신라불)과 석탑이 있었는데, 석탑은 일인(日人) 모씨가, 석등은 보길도의 김상근이 가져갔다고 전하고 있다.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항상 위험한 바닷길을 넘나들었던 장보고 선단의 사람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을 것이고 당나라에 법화원을 두었던 것처럼 청해진 본영에도 같은 목적의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장보고 선단은 수많은 유학승을 실어 날랐고 나말 선종산문의 개창에도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상왕봉 상여바위 밑에 관음사지와 중암사지가 위아래로 남아 있다. 이 관음사가 청해진 무역선단의 원찰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백제의 관음보살 신앙은 사상적으로는 법화경의 유포에서 시작하여 화엄경의 홍포로 성행하였다.
신앙적으로는 관음신앙에서 비롯하여 의상의 관음도량으로 불을 지피더니 신라 선원들에 의하여 꽃을 피우게 되었다. 관세음 신앙의 소의경전인 법화경(묘법연화경) 보문품 제25에는 대중과 해상선원은 물론이거니와 무역상인들을 중심으로 관세음신앙이 크게 유포될 수밖에 없었던 말씀들이 담겨 있다.
완도에 건립되었던 법화사나 관음사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만 하다. 841년 장보고의 죽음과 851년에 있었던 벽골제로의 강제이주는 성행하던 법화사 관음신앙도 그곳에서 오래도록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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